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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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배경


메이지법률학교, 현 메이지대학교는 기시모토 다쓰오(岸本 辰雄)·미야기 고조(宮城 浩蔵)·야시로 미사오(矢代 操)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기시모토는 돗토리 번(鳥取藩), 미야기는 덴도우 번(天童藩), 야시로는 사바에 번(鯖江藩). 이처럼 세 사람은 각각 에도(江戸)에서 제법 떨어진 지방의 번에서 에도시대 말엽인 가에이(嘉永:1848~1854) 연간, 녹봉이 낮은 사족(士族) 집안에 태어나 성장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막부 말기 유신(維新)의 동란과 변혁 가운데 메이지(明治) 정부의 명을 받은 번의 선발생(공진생[貢進生])으로서 상경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게 된 곳은 사법관료의 단기 양성을 목적으로 사법성이 설립한 메이호료(明法寮, 훗날의 사법성 법학교)였다. 이 학교를 통하여 ‘고용 외국인’ 교사 브와소나드(Boissonade)에게 프랑스 법학을 사사한 그들은 각자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기시모토는 프랑스에 유학 후 귀국하여 판사가, 미야기 역시 프랑스로 유학하여 귀국 후에는 검사가 되었다. 야시로는 원로원(입법기관)에 직을 두는 한편, 법률사설학교인 강법학사(講法学社, 기타바타케 도류[北畠道竜]가 설립) 등의 경영과 교육을 맡았다. 。


메이지법률학교의 탄생


사법성 법학교 재학 이래 친분이 매우 두터웠던 창립자 3인은 서로 직무를 달리하면서도 늘 최신의 본격적인 법률교육을 하고자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강법학사 설립자의 경영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학생들이 퇴학하여, 그 중 십수 명은 간다오가와초(神田小川町)의 장옥(長屋)에서 자습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이전에 강법학사에서 강사를 하던 기시모토, 미야기에게 새로운 법률학교의 설립을 청원하기에 이른다. 기시모토와 미야기는 친우이자, 강법학사 내 학생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던 야시로를 권유하여 도쿄부(東京府)에 사립법률학교설치원을 제출하였고, 드디어 1881년(메이지 14년) 1월 17일, 고지마치구(麹町区) 스키야바시(数寄屋橋)의 일각(현재의 유라쿠초[有楽町]·스키야바시교차점 부근) 구 시마바라 번(島原藩) 저택 자리에 법학교를 개교하였다. 바야흐로 자유민권의 풍조가 한창이던 때에 메이지법률학교는 ‘권리자유’를 교훈 삼아 프랑스법을 중심으로 교육에 임하였다.

메이지법률학교는 자금난에 시달렸지만, 지원자는 나날이 증가해 갔다. 그 때문에 결국 1886년(메이지 19년) 12월 11일, 간다미나미코가초(神田南甲賀町)에 자비로 교사(校舎)를 신축 이전하였다.

하지만, 그 후 메이지법률학교의 행보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특별감독 조례규정에 따라 도쿄제국대학의 통괄 관리하에 놓이는 등 사학 병합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사학박멸’ 정책이었다. ‘권리자유’를 표방하는 본 학교는 특히 그 표적이 되었다. 또한, 국가정책에 따른 독일·영국법의 보호는 결국 프랑스법(본교 등)과 대립을 야기하기에 이른다. 그 정점은 민법전(民法典) 시행을 둘러싼 일대 논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프랑스 법계는 패배하였다.


대학 승격에서 전시체제(戦時体制) 속으로


메이지법률학교가 대학령에 따라 대학교(메이지대학교[明治大学])가 된 것은 1920년(다이쇼 9년) 4월 1일의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숱한 고난과 노력이 있었다. 학위 ‘메이지법학사(明法学士)’의 발안과 수여, 전문학교령에 의한 ‘메이지대학’ 인가, 법학·상학·정치학·문학의 4개 학부체제, 스루가다이(駿河台) 이전, 대학 승격을 위한 모금 운동 등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교직원·학생·교우들의 분투와 노력 속에 종합대학으로서 메이지대학교가 성립된 것이다.

당시 캠퍼스는 유학에서 귀국한 신진 기예의 교원, 상당수에 달하는 유학생, 나아가 다이쇼 민주운동(democracy)의 지지 학생, 그리고 때로는 학원소동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새로운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전통적인 재야정신·반골정신을 축으로 학원은 좌로 우로 흔들리기도 하며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활기를 띠어 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학원에 커다란 타격을 입힌 것은 간토대지진(関東大震災, 1923, 다이쇼 12년 9월 1일)이었다. 하지만, 괴멸적이었던 학원의 잿더미로 달려와 누구보다 먼저 복구·부흥에 힘을 기울인 것은 교직원은 물론, 학생·교우들이었다. 그 결과, 1928년(쇼와 3년) 4월 21일에는 기념관에서 부흥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는 경제불황, 군사확대, 테러의 어두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고, 메이지대학교 역시 파시즘(fascism)과 전시체제(특히 태평양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흥아과(興亜科)의 설치, 근로 동원 및 학도 출진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교육의 확대, 스포츠의 진흥, 예과의 이전(이즈미[和泉] 캠퍼스) 등과 같은 긍정적 측면이 인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전후 부흥에서 새로운 시대로




본 대학교는 1949년(쇼와 24년) 2월 21일, 신제(新制) 메이지대학교로써 인가되어 새로이 출발하였다. 학부는 법학·상학·정치경제학·문학·공학·농학의 6개 학부가 되었으며, 더욱이 이듬달 25일에는 제2부(야간제)가 설치되었다. 물론 이 시기에는 당시의 사회상황과 맞물려 본교 내에도 커다란 혼란이 발생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대학을 지향하는 기개와 희망에 넘쳐 있기도 하였다.

이후 메이지대학교는 이쿠타(生田) 캠퍼스 개설, 대학원 확충, 경영학부 신설, 나아가 새로운 캠퍼스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제도와 시설설비 확충은 급속하게 추진되었지만, 1960년대 무렵부터 학내의 질적 개혁이 제창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전교련(専教連)개혁, 학비문제, 또한 전공투(全共闘)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메이지대학교는 1980년(쇼와 55년) 11월 4일,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또한, 21세기를 맞이한 2001년(헤이세이 13년) 11월 1일에는 창립 120주년 기념식전의 개최와 함께, 창립자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축하 행사를 거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건학 정신에 준거하여 본교의 역사를 검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아울러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대학으로서의 위상 또한 급속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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